유관순柳寬順은 1902년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柳重權과 이소제李少悌의 3남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고향, 지령리 마을은 케이블 선교사와 유빈기(유관순의 작은할아버지)에 의해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유관순의 가족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교회를 다녔다. 마을은 교회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신학문을 빠르게 흡수했다. 다만, 아버지 유중권만은 조상에 대한 의무를 지키기 위해 제사를 지내며 유교적 전통을 이어갔으나,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존중하고 배움의 뜻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우리집 씨가 본래 괄괄하지. 관순이도 여간내기가 아니고 나도 무던한 고집덩이라……. 집안이 모두 예수를 믿는데도 끝내 예수를 등져낸 유학(儒學)의 아버님도 그러하셨어. 그 분은 그 고집으로 삭발도 않고 배겨내셨지.”
유관순이 5살 되던 해인 1907년, 일본에게 빌린 차관을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확산한다. 천안지역은 천안, 직산, 목천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총 3,512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지령리 마을에서도 “충남 목천 이동면 대지령 야소교당”이라는 교회의 이름으로 82명의 교인이 의연금을 납부했다.
명단에는 유석 조병옥의 부친이자 교회의 속장이며,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인원(조성택)과 그의 형인 조형원, 유관순의 숙부로서 아우내 만세운동에 함께 앞장선 유중무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시골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82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은 천안 지역 내에서는 유일한 일이었다.
교회는 유관순의 놀이터이자 배움터였고, 유관순이 지키고자 한 자유와 평화의 가치와 몸소 보여준 실천은 가족과 마을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워온 유산이었다.
“그 시절엔 반절(한글)이라고 했겠다. 아무도 가르치지도 않은 그 반절을 혼자 익혀 성경을 읽더니 외워대지 않겠어요? 재주는 꽤 있었던 것 같아.”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당찬 아이였다. 친구들과 놀 때도 지기 싫어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으나, 항상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타인을 배려했다.
“내가 17살에 5~6가구밖에 살지 않는 이 마을에 시집을 왔을 때, 소녀 관순은 귀밑머리, 황새머리, 조랑머리로 머리를 세 갈래로 닿고 사내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으니 5살 되었을거야.”
“관순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장난을 좋아하고, 장난을 하면 반드시 우두머리가 되었다. 달 밝은 밤이면 완고한 어른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앞 냇가에 있는 모래사장에 달려가서 진쌈하기와 술래잡기를 하는데, 매양 대장 노릇을 하고, 줄넘기를 하면 제 길로 한 길은 쉽게 뛰어넘었다. 추운 겨울이라도 널뛰기는 물론이요, 남자처럼 얼음 지치기와 눈장난을 하고, 방 안에 있을 때도 동무들과 같이 풍계묻이와 쌍륙을 치면서 큰 소리로 웃으며 유쾌하게 놀았다.
이 모양으로 관순은 여자라기보다 차라리 남자다운 기운이 있으므로 ‘장난꾼’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리고 동정심이 많아서 언제든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며, 심술궂게 싸우거나 부모의 말을 거슬러 근심을 끼치는 일은 도무지 없었다. 부모가 시키는 일은 첫 마디에 순종하고, 비록 힘에 겨운 일이라도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에 어른의 말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한사코 듣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기때문에 어른들도 능히 그 뜻을 굽히지 못하였다.”
유관순이 8살 되던 해, 일제의 식민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시작으로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빼앗고, 1910년 국권을 강탈하며 헌병을 앞세운 감시와 탄압으로 이른 바 ‘무단통치’라는 탄압정책을 펼친다.
기울어가는 국운 앞에서도 어린 유관순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집안사정이 어려웠던 유관순은 사애리시 선교사(Alice H. Sharp)의 추천으로 1915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교비생 자격으로 진학한다. 학업에 열중하며, 새로운 친구들과 우애를 쌓고, 근대 신식 교육을 받으며 꿈을 키워나갔다.
“관순이 성질은 몹시 외향적 성격이었고 퍽 남성적이었습니다. 또한 동정심이 풍부했습니다. 관순이는 공부하다가도 얼떨결에 '만두나 호-야‘ 소리를 들으면 없는 부스럭 돈을 들추어내서라도 곧잘 그것을 팔아주곤 했습니다. 지금도 밤에 '야식'이나 '메밀묵'을 팔러 다니는 어린 학생들의 처량한 음성을 들을 때면, 가끔 관순이의 복스럽던 모습이 한 폭 그림이 되어 떠오릅니다. 정말 관순이는 복스럽게 생겼습니다.”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은 규칙에 따라 아침 7시에 기상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종일 수업을 듣고 8명이 쓰는 기숙사 방에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생활했다. 일요일이 되면 유관순을 비롯한 전교생은 단정한 옷차림으로 정동교회로 향했다. 정동교회는 손정도 목사가 청년과 학생들ㄹ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며 나라와 민족, 신앙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의지를 불태워주었다. 1918년 6월까지 정동교회를 맡았으며, 이후 상해로 넘어가 이동녕의 뒤를 이어 제2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된다. 손정도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필주 목사는 훗날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을 활동한다.
3.1운동이 있기 전의 어느 날 밤, 유관순은 친구 이정수를 불러 강당으로 가자고 말한다. 그 곳에는 유관순이 사 온 종이와 빨강, 파랑 물감이 준비되어 있었다. 유관순과 이정수는 강당 한 구석에서 촛불을 켜고, 찬 손을 불어가며 태극기를 그렸다. 당시 태극기를 본 사람이 드물었기에, 태극은 밥공기를 엎어 그리고, 팔괘는 정확히 알 수 없어 흉내만 냈다. 이렇게 만든 태극기를 기숙사 36개 방마다 붙여 다음날 선생님과 학생들이 깜짝 놀라는 소동이 일었다.
“관순이는 괄괄한 성격에다 자존심이 강했어요. 3.1운동 때 옥사하지 않았더라면, 해방 후 분단 조국의 현실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참고문헌>
조선일보, 고인회억(故人回憶) ⑤ 즐겨놓던 십장생(十長生)의 수(繡) 1961.08.26.
김창엽, 중앙일보, “나는 유관순과 한방쓴 친구”/이화학당 기숙사동기 보각스님 회상 1993.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