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선생의 사상
석오 이동녕이 10대 전후기인 1870년 우리나라는 개화사상이 싹터 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시 북경에서 세계의 신문물을 접견한 박규수의 개화사상과 조부의
살학사상 속에서 성장한 석오는 자연스럽게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명문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특권의식이나 지배와 피지배의
엄격한 구분 따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동녕은 일찍이 평등개념을
품게 되고, 상동교회에서 기독교인 전덕기와 함께 민족의식과 평등평화사상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이후 1918년 50세 때 대종교인 백순과 동만주 영안으로간 이동녕은 대종교가 곧 민족 정통사의 핵심이며 맥이라고 판단하였는데, 원래 기독교 신자였던 그가 대종교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대종교가 민족주의 사상고취에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민족의 자생종교로 시대적 상황과 극복의 의미로 중관된 대종교는 한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것을 신앙적 차원에서 이끌고 갈 사명의식으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방황하는 민족에게 용기와 신념 그리고 자신감을 주는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민족의 정통사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석오는 대종교를 통해 2천만 우리 동포에게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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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 석오
석오 이동녕은 1893년 원산에서 부친이 운영하던 광성학교(후에 광명학교로 개칭)에서 육영사업을 시작으로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함께 상동청년학원(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주의 교육을 전개하였다.
1906년 이후 석오는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이 여의치 못하자 국외로 나아가 동포들에게 교육구국의 의지와 신념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길림성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한국사와 한문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일제의 탄압으로 서전서숙이 문을 닫자 다시 국내로 들어온 이동녕은 도산 안창호와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청년 육성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마침내 석오의 구체적인 청년 육성계획은 1911년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신흥무관학교는 최초의 사관학교로서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우리의 외교권이 탈취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장독립군을 양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진작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광복투쟁을 주도적으로 담당할 역군을 길러낸 문무겸전의 인재육성의 요람이었다. 이처럼 석오 이동녕은 일직이 민중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교육사업을 지속해온 민족의 교육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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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석오
석오 이동녕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도에 대해 고민하던 중 “제국신문”을 창간한 이종일을 찾아가 그의 신문사업에 가담, 제국신문의 비상임 논객으로 사설을 집필하면서 체제의 개혁과 시국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그가 처음 쓴 개화와 자강에 관한 사설의 제목은 [자강의 방도] 였다. 내용을 요약하면 ‘자강을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강대국에 침략당할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것을 면하려면 먼저 세계의 발전에 발 맞추어 개화를 힘써 실천해야 한다’고 기고하였다. 그는 국민참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현대에는 나라의주인이 국민임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석오는 재러시아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줄 방법은 신문을 통한 계몽이라고 보았고, 이에 해조신문 대동신문을 발행하였다 [해조신문]은 대한제국 말기에 러시아 지역에서 발행된 한글신문으로 1908년 2월 26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호를 발간하고 같은해 5월 26일까지 3개월 동안 총 75호를 간행하였다. 해조신문은 러시아 거주 한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라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