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선생의 생애
- 석오이동녕
- 이동녕 선생의 생애
석오 이동녕선생은 1869년 9월 2일(양력 10월 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의성 군수 등을 지낸 교육자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봉소(鳳所), 호(號)는 석오(石吾)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언론·교육활동, 청년회 조직 등을 통해 개화민권,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이후 조국의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전생애를 바쳤다.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연좌데모 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른 후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였고, 귀국하여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0년 다시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해외 동포들의 힘을 모으고,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으며 무오독립선언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서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국호, 임시헌법, 관제제정, 민주공화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임종하시는 순간까지 의정원의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 등의 중책을 맡아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끄셨다. 또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당수로 정당통합 운동에도 노력하였다.
1940년 72세를 일기로 급성폐렴으로 중국기강에서 서거, 임시정부 국장으로 모셨고, 광복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하여,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유언으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광복운동의 일원화를 남기셨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석오연보
- 제1시기(1869~1899) 자세히보기
- 천안에서 탄생한 후 한문을 익히고 상경하여 응제진사에 합격한 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때
- 민권운동과 개화운동에 투신 한 뒤 제국신문의 논객을 역임하여 언론창달에 눈뜸
- 제2시기(1900~1918) 자세히보기
- 국권을 강점당한 전후 해외에 나가 독립투쟁을 전개한 시기
-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박탈되자 상동교회에 들어가 기독교인으로서 조약폐기에 애를 태움
- 이후 북간도(용정)에가서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운영,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섬
- 부민단, 권업회,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운영
- 대종교를 민족의 정통사상으로 받아들이고, 동포에게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을 체계적으로 견지
- 제3시기(1919~1940) 자세히보기
- 50대~70대까지의 20여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 국내외를 효과적으로 다스려왔던 결산기
- 군주제 청산, 민주공화제를 처음실시하여 의회민주정치의 제도적 장치와 그 실천을 진두 지휘했던 법통성의 첫주자
- 세 번의 의정원의장 등 입법부 수반을 역임
- 그 외 각부 총장(장관), 국무총리, 국무령, 대통령대리, 주석(1935.10.~1940.10.) 등 행정부수반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한 우익단체의 지도자
- 김구 등과 같이 독립투쟁과 한국독립당 등을 운영 조직하면서 10여곳의 임정 수도를 여건에 맞게 이동함
-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막후에서 상결(商決)한 뒤 김구로 하여금 계획지도케함 →임시정부의 내정, 교통, 군사, 외교, 교육, 문화, 사법, 재정 정책을 적당히 조절 집행하며 내외동포에게 자신감과 용기, 신념을 불어넣어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