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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대동
팀명 부성동 등록일 2015-11-30 조회 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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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시에서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4Km지점에 국도양편에 펼쳐진마을 이마을
은 삼국시대에 이미 형성된 마을이다. 한자로는 富垈라 하여부자터로 쓰여지고
있으나 토질이 척박하여 매우 빈촌이였으나 최근에 많은 공장이 들어서고 도시근
교농업이 발달하여 농가수입이 증대되면 서글자 그대로 富垈가 되었다.
부투리 또는 비투리락도도 부르고 있으며 부대라는 말의 원천은 복들에서온 것이
다. 북들의 어원은 한자로 고정(鼓庭)에서 유래된 것으로 鼓 북고와 庭 뜰정에
서 북뜰이 되었던 것이 부투리로 변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천안조에 천안북허십리유고정(天安北虛十里有鼓庭) 이라는 기록
으로 보아 鼓庭은 천안에서 북쪽으로 십리에 있음이 확실하다
고려태조 王建이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후백제의 신검 양검들을 정벌하려고
天安에 8만7천5백의 大軍을 주둔시키고 달북재(達鼓峰)에 북을 매달고 군사를 조
련하였다. 이때의 군사훈련장소가 지금의 부대동이다.
본래 천안군의 북일면에 속하였던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영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1년 천안읍제가 실시되면서 환성면에 속했다가 1963년 천안시
승격에 따라 富垈洞이 되었다


애고개(왜고개) : 두정동에서 부대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고갯길이 굽어져 S자
모양으로 되었고 지금의 국도다. 옛날부터의 三南大路中의 하나로 경부
선 철로가 고개 옆으로 놓여졌다. 부대동 북쪽에 마을을 지나면서 왜정
때부터 해방후까지 공동묘지가 있었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공동묘지에 시신을 묻고 오던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묘지가 보이지 않으매 슬피울고 넘었다하여 「哀고
개」라고 하였다 한다. 또 다른말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이 죽은 시신이
넘나들었다고 애고개라 하였다고 한다.
또다른 전설에 의하면 "왜소개"로 전하기도 한다. 1597년 정유재란때
북쪽의 성환에서 素沙坪大會戰이 있었다. 이때 倭軍의 후방기지가 이곳
에 있었다하여 倭고개라고도 전한다.

안터(內垈) : 본동마을에서 동쪽으로 돌모롱이 산을 끼고 약 1㎞ 가량에 있다.
국도변에서는 산이 가려서 보이지 않으나 양지바르고 아늑한 10여호의
마을 북쪽은 달북재에 막혀있고 동쪽으로 산을 넘으면 천안군 성거읍의
요방리에 닿는다. 마을의 안쪽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안터(內
垈)라고 한다.

달북재(懸鼓山:達鼓山) : 부대동 본동마을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삼각형 모
양의 산. 오래전에 공동묘지가 설치되었다가 최근에 모두 없애고 산허
리를 깎아 큰 정유공장이 들어섰다.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이곳에 많은 군사를 주둔시키고 조련할 때 달북재에 북을 달아놓고
신호로 하였다 하여 달북재라고 하였다.

돌모롱이산 : 안터마을에서 서남쪽에 있는 산. 「돌모퉁이산」이 변해서 돌모롱
이 산이 되었다. 부대동 본동마을에서 안터로 가는 길가에 돌이 튀어나
와 산모퉁이를 이루고 이것으로 인하여 작은 계곡이 꼬부라져 흐르고 좁
은 오솔길이 S자 모양으로 굽어 지나고 있다. 작은 바윗돌이 산모퉁이
에 튀어나왔다고 돌모롱이 산이다.

선낭당고개(城湟堂) : 부대동에서 신당동으로 넘어가는 국도. 고개에 올라서면
멀리 성환지방까지 한눈에 보인다. 天城川과 天安川의 分水領이기도
한 이 고개는 동쪽으로는 달북재가 솟아있고 서쪽에 낮은 구릉에는 천안
공업전문대학교가 세워졌다. 1940년대까지도 고개의 정상부에 큰 고목
이 서있었고 길가는 길손들에 의하여 던져진 돌묻이가 있어 매우 큰 선
낭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
다.

됨박산 : 안터마을 앞에서 300m 가량 남쪽에 있는 산. 산의 모습이 됨박같다하
여 됨박산이다. 됨박이란 가을에 잘 여문 박을 생긴 그대로 구멍을 뚫
고 속을 파내어 말려서 씨앗을 넣어 매달아 놓았다가 다음에 썼던 씨앗
보존 용구다. 산의 모습이 아래가 둥글고 그위에 다시 둥근산을 올려
놓은 것 같다고 이름지었다. 山의 형세가 비슷한 것이 여러개가 있어
風水地理하는 이들은 群鷄包卵形이라고 하여(여러마리의 닭이 알을 품
고 있는 형상) 예부터 명당으로 알려진 산이다.

서들 : 부대동 서쪽에 있는 들. 경부선 철도의 서편 들이다. 경기평야의 꼬리
부분으로 업성동과 성환들로 이어져 평택과 안성지방의 경기평야로 이어
진다. 서들 복판을 흐르는 작은 내(川)는 安城川의 源流로 南限界의 끝
부분이다. 마을의 서쪽에 있다고 서들이다.

사기쟁이(沙器店) : 신부동의 역말(驛村)동리에서 (북일고등학교가 있는 마을)
작은 야산(公山)을 넘어 부대동의 안터마을로 연결되는 오솔길이 있다.
지금의 국도가 개설되기 이전에 있었던 옛길이다. 이 길가에 옛날에 사
기그릇을 굽던 터가 있었고 그 옆에서 구은 사기그릇을 팔았다고 사기점
이다. 사기점이 변해서 사기쟁이가 되었다.

후릿고개(후리고개) : 부대동 안터마을에서 달북재의 기슭을 넘어 샛터마을 검배
골로 가는 고개. 지금은 길의 자취만 남아있고 길은 없다. 마을에 내려
오는 전설에 의하면 어느때의 난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胡人(오랑캐)
들이 넘어왔다고 "胡來고개"가 변해서 후릿고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원넘어(院넘어) : 부대국민학교와 천안공업전문대학교가 있는 마을. 부대동 마
을에서 성공회교회가 있는 통마니산을 넘어서 지름길이 나왔다.
옛날에 길가던 길손들이 머물다 가고, 잠자고 쉬어가던 곳을 院이라고 하
였다. 지금의 두정동에 옛날에 풍천원(楓川院)이라는 원이 있었다.
이 풍천원 산넘어에 있는 마을이라고 院넘어라고 하였다.

대갈장군묘(頭墓) : 경부선 철도의 서쪽. 서들넘어 성성동과의 경계에 있다.
어느 전란때의 일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곳에 큰 무덤이 있고 그 무덤속
에는 장군의 머리만 묻혔다고 하여 대갈장군묘라고 전한다.
또 다른설에 의하면 장군이 타고 다니던 말을 묻었다고 전한다.

※ 우리나라 각처에 말무덤이 많다 이것은 대개가 백제때의 고분으로 밝
혀지고 있으니 이 무덤도 백제때의 고분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핫들(하들:下野) : 부대동 마을앞에 펼쳐진 들. 아래쪽은 서들에 이어지고 위쪽
인 동쪽은 상들에 이어진다. 상들(上野)의 반대되는 들이라 하들이라 하
였고 하들이 변해서 핫들이 되었다.

조가터(趙家垈) : 안터에 있는 골짜기. 옛날 조씨姓을 가진 사람이 살던 집터라
고 하여 조가터라고 하였다.

칠만지(七萬池:안터방죽) : 안터마을 앞에 있는 큰 방죽. 보통 안터방죽이라고
한다. 이방죽을 칠만지라고 하는 까닭은 1955년 천안군 환성면의 면장으
로 있었던 임석재(任碩宰)씨가 근속 10년 기념으로 제방을 쌓아 만들었고
그가 10년근속 하면서 면내를 순시한 거리가 약 7만리는 되었을 것이라고
하여 칠만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승적골(勝賊谷) : 안터앞에 있는 골짜기. 동쪽으로 산을 넘으면 성거읍 요방리
에 닿는다.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이 골짜기에서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여 승적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탑골(塔谷) : 안터마을앞에 있는 됨박산 골짜기. 옛날에 작은 암자가 있었고 암
자앞에 탑이 있어 탑골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탑이 없고 암자의 주춧돌
만 나오고 있다.

성공회교회당(聖公會敎會堂) : 1920년 11월 4일에 처음 문을 열었으며 성공회 대
전교구에서도 가장 먼저 세워졌다. 창설초창기에는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北一學校를 설립하였다. 지금의 북일고등학교가 그 이름을 딴 것
이다. 부대동 마을 사람들이 대부분 성공회 교인이며 신앙심이 두텁고
대동의 합심이 잘 되는 까닭도 교회를 중심으로 뭉치기 때문이다.
등구봉 산 남쪽 옛 건물을 헐고 최근에 깨끗하게 새로 단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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