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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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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봉명동
팀명 봉명동 등록일 2015-11-30 조회 8090
첨부
 
천안군의 하리(下里)면 지역이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의항리
(蟻項里)와 다가리(多可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봉서산(鳳棲山)의 이름을 따서 봉
명(鳳鳴)이라 하여 영성면(寧城面)에 편입되었는데 1920년행정구역 변경에 의하
여 영성면이 천안읍에 들게되는 동시에 본동을 둘로갈라서 봉명정 산평정(山平
町)이라 하다가 1946년 왜식동명을 없애고 町을洞으로 고치고 山平町은 多可洞으
로 고쳐서 각기 독립되었다.

예부터 닭이 천마리면 봉이 한마리 있다고 하는 속담과 같이 최근 봉명동에는 병
아리 부화장이 많이 세워져서 많은 병아리 속에 봉의 새끼 한 마리쯤 태어나서
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동이다.

봉서산(鳳棲山)(158m) : 흔히 말하는 개목부락의 뒷산이다. 천안시가지의 서쪽
을 감싸고 있는 야산으로 두정동의 노태산과 연결되어 그 남쪽은 月
峰山에 이어지고 있다.
봉황새는 상상의 새로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다. 다른 말로 주
작(朱雀)이 라고도 부른다. 古代 묘의 벽화에 많이 그려졌던 새로
태평성대인 요순시대에 한번 지상에 왔었고 아직은 지상에 온 일이
없다고 한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西江이 아니면 목욕하지 않고 온몸이 붉은 깃털로 싸
여있는 신성스러운 새로 전해지고 있다. 봉서산은 봉황새가 깃들어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하여 봉서산이다.(飛鳳歸巢形)

봉서산 선사유적지(先史遺蹟地) : 1965년 봉서산 중턱에 세워진 청황사(靑黃寺)
의 주지 이일섭씨가 뒷산에서 斷面圓 形의 검은색 돌도끼를 수집하
여 보고 하므로서 시작되어 1965년 10월 2일 三佛 金元龍박사가 발
굴을 시작한 곳이다. 유물의 출토지는 낮은 산상으로 지금은 모두
밭을 일구어 파괴되었고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나 타제석기와
함께 홍도(紅陶) 즐문토기편(櫛文土器片)이 끼어 있어 신석기대 말
기에서부터 청동기시대 초기까지의 선사인의 서식지로 알려지고 있
다. 1986년 향토사학자들의 재조사에 의하면 비록 표면 채집이기는
하지만 무문토기유적(無文土器遺蹟)이면서 홍도기 출토며 또 석기도
마제돌도끼 이외에 차돌타제석기(石英打製石器)와 반달모양돌칼(半
月形石刀)과 같은 석기류가 수집되는 것으로 보아 흥미있는 연구자
료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같은 장
소에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공존하였음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차돌로 만든 석기류는 앞으로 무문토기 유적에의 우리들의 새로운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며 더욱 연구하고 살펴보기 위하여 봉서산의
유적지는 잘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개목(蟻項:개미목) : 봉명동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자연부락으로는 가장 크다.
마을의 지형이 개미의 목처럼 생겼다고 개미목이라고 하였다.
또는 개목은 犬項이라고도 하여 개의 목과 같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개목마을의 형성은 시대적으로 보아 천안시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
로 이미 선사시대에 이루어졌다.
(앞의 선사유적지에서 밝혔음) 옛날 아산지방의 바닷가에서 생산되
는 소금과 내륙지방의 곡식이 교환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백성동 고개 너머에 소금쟁이라는 마을이 있다. 소금쟁이는 소금장
이로 염시장(鹽市場)을 말하는 것으로 이 소금장은 개목마을과 직결
되는 곳이다. 개목의 "개"는 "支"와 같은 뜻으로 "本"만 못한 것이
다. 고로 개목은 支項으로 불러도 좋은 곳이다. 소금쟁이만은 못
한 곳으로 작은 물물의 교환장소이다. 선사시대의 인류라고 소금을
먹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개목남근석(男根石) : 개목마을의 동구 앞에 있었으나 시가지 조성과 도로 확장
으로 원자리에서 세워졌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동구 앞에 돌을 세
워 마을의 표식을 하였다. 그 표식돌은 여러 가지 형태로 되었으나
주로 많은 것은 男根石이다. 남자의 性器를 닮아서 그것을 직립으
로 세워 머리가 하늘을 쳐다보게 세워졌다. 선사시대에 男兒選好思
想과 풍요사회를 기원하던 표식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기념비적 역할
도 하였다. 개목부락은 이미 선사시대에 조성된 마을이라 이와 같
은 男根石이 세워졌다.
우리나라 농촌마을에 "산돌말"이라는 곳이 많다. 이것은 立石村으
로 先史社會의 유풍이다. 입석은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였고
신앙의 대상으로 이용되어 왔던 Menhir이다.

부챙이(富倉里, 富昌里:부창리) : 천안고등학교를 바라보아 왼편의 골짜기를 가
르킨다. 옛날에 부자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의 창고가 많이 있었다
고 부창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사실은 지금부터 백년전까지만 해도
집이 없었던 곳이며 미라골로 넘어가는 오솔길이 있었을 뿐이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이곳에 와서 광산을 개발하고 금광을 일구었던
곳으로 지금도 흰 복사가루가 동산과 같이 쌓여 있다.
금광은 해방직후에 없어지고 주택들이 들어서서 옛날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병막(病幕) : 지금의 천안의료원 자리다. (도립병원) 옛날에 전염병 환자나 나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던 곳이라 "병막"이라고 하였다. 병막을 다른
말로 병마개라고도 불렀다. 왜정때까지도 병막으로 이용되었으나
지금도 도립천안의료원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예부터 병원과 관계가
깊었던 곳으로 지명이 미래를 예언했다고 보아야 겠다.

씨알농장 :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 종교계와 신학계의 거성이었던 함석헌옹이
경영하던 농장으로 그는 이곳에서 손수 농장을 경영하며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지금은 농장이 없어지고 주택이 들섰다.
(경일주택 아파트)

차돌고개(眞石 : 直石) : 봉명동에서 가장 남쪽이다.
고개의 반대편은 다가동이고 고개너머는 쌍룡동이다. 차돌고개는 천
안에서 온양온천으로 가는 국도이며 대도로이다. 도로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소로길이였으나 교통량이 확산되면서 중폭되었다.
도로가 확장되기 이전에 양쪽 길가에 차돌이 박혀있어서 차돌박이라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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