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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량동
팀명 원성동 등록일 2015-11-30 조회 5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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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태조 왕건이 936년에 후백제의 신검(神劍) 양검(良劍)을 정벌하기 위하여
천안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8만여명분의 군량을 쌓아두었던 곳이라 하여 글자
그대로 유량동이다. 이곳에서 머물렀던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가 북상하여 올
줄 알았으나 북상하지 않고 경상도 선산(善山) 지방에 포진하므로 그곳에 내려
가 격전을 벌린 끝에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유량동은 본래 천안군의 상리(上里)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교
촌리 당후리 분곡리 상평리 하평리 평리 신리 상촌리 등을 합하여 영성면에 편입
되었는데 1931년 천안읍에 편입되었다.
※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토의 재통일을 기하는 전진기지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 유량동이다.

향교말(校村里:교촌리) : 전국의 향교가 있는 마을은 교촌리라고 부른다.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왕자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도시화 되었고 뒷산에 체육공원이 만들어지고 이웃에 오룡경기장
이 설치되면서 도시변의 마을이 되었다.

천안향교(鄕校) : 유량동 190번지 왕자산 아래에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통치
이념이 유교였기 때문에 서울에 성균관이라는 대학기관을 두고 지방에 향
교를 세워 지방양민의 자제를 교육하던 학교로 유학을 공부하던 곳이다.
향학의 시작은 고구려의 경당에 소급하여 볼 수 있으나 그후 고려 인종때
에 제도화되었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지방교육제도를 정비할 때 세
워진 것으로 본다.(건립연대는 정확치 않다.)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
倫堂) 동묘(東廟) 서묘(西廟) 동제(東濟) 서제(西濟) 전사고(典祀庫) 삼
문(三門) 등이 현존하고 있다. 開化 이후에 들어오면서 학교가 세워진
뒤에는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다만 文廟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다.

체육공원 : 최근에 천안시가 시민의 체육활동을 위하여 설치하였다. 명칭이 태
조산체육공원으로 되었으나 잘못된 것이다. 공원이 설치된 산은 왕자산
이다. 고로 왕자산체육공원이라야 옳다.

왕자산(王字山) : 유량동 마을의 뒷산이다. 멀리 천안삼거리쪽에서 산을 바라보
면 산골짜기가 파여진 것이 王字모양으로 되었다고 왕자산이다.

태조산(太祖山) : 민방위학교와 교보생명인재개발원이 세워진 산.
멀리에서 바라보면 둔삼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천안의 진산(鎭山)이
다.
936년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군사를 주둔할 때 태조곁
에 있었던 술사(術師) 예방(倪方)이 태조와 함께 이 산에 올라 천안의 지
형지세를 살펴보고 오룡쟁주의 형상이라고 태조에게 간했다는 산이다.
고려태조가 오른산이라고 하여 태조산 또는 태조봉이라고 한다.

형제봉(兄弟峰) : 태조산의 줄기 민방위학교와 야영장의 북동쪽에 있는 산.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는 형제와 같아서 형제봉이라고 하였다.

장태산(長泰山:장대산:將台산) : 유량동 입구의 동남쪽 고속도로변에 있는 산.
고속도로에서 손에 닿을 듯 하며 경관이 아름답다. 고려태조 왕건이 이
곳에 주둔할 때 장대(將台)를 설치하였다고 하여 장대산이 오랜세월 변하
여 장태산이 되었다.

마점산(馬占山) : 장태산 뒤쪽의 높은 산. 천안의 구읍지 영성지에 마점산과 마
점사의 내력이 보인다. 고려태조 왕건이 이곳에 말을 매어두고 쉬었다
하여 마점사라 하였고 마점사가 있는 산이라 마점산이라 하였다.
왜정때 산정에 회전식 등대를 설치하여 항공기의 항로를 안내하였으므로
불빛이 회전한다고 불도는 산이라고 불렀다.
※ 마점산에 있었다는 馬占寺는 수차 답사하였으나 자취를 찾을수 없다.

담넘어(堂越) : 유량동 마을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마을.
유량동 마을 앞에 흐르는 냇가 언덕에 옛날에 작은 신당(神堂)이 있어 신
당넘어 마을이라 당넘어라고 하던 곳이 담넘어로 변음된 것이다.
지금은 신당이 보이지 않는다.

대석골(臺石谷) : 형제봉 밑 지금의 야영장이 있는 안쪽 골짜기.
맑은 옹달샘이 있고 그 안쪽에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터 아래에 크고 넓
은 바위가 대석골이라고 하였다.

조라지고개(도라지고개) : 유량동에서 천안군 목천면 덕전리 유왕골로 넘어가는
고개.
꼬불꼬불 굽어진 고개길이 길고 험하여 넘어가는 도중에 졸음이 온다고
하여 조라지 고개다. 지금은 도라지고개로 불리고 있다. 신작로가 개
설되기 이전에는 목천지방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천안에 이르렀던 대
로였으나 지금은 한적한 오솔길이 되었다.

동막골(東幕谷) : 유량동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은 몇 가호가 있으나 옛날에
는 마을이 없고 농막(農幕)이 있었다고 하여 동막골이다.

벌말 : 향교말 앞의 긴 들속에 있는 마을이다. 벌판속에 있는 마을이라 벌말이라
고 하였다.

분톳골(盆谷:둔텃골:분토골) : 유량동 서쪽 왕자산 아래에 있는 마을.
마을의 생김새가 분(盆)과 같이 오목하고 아늑하다고 하여 분곡이라고 하
였다. 조선 인조때의 학자 이승벽(李承壁)이 이곳에 살면서 마을 이름을
따서 호(號)를 분곡(盆谷)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설에 의하면 옛날 시멘트가 없을 때 부엌이나 뜰을 칠하는 도료
(塗料)가 분토(粉土)였다. 이 분토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분토골이라고 하
였다고 전하며 지금도 분토가 많이 나오고 있다.

북바위 : 옥녀봉 아래에 있는 바위.
바위의 생김새가 북(鼓)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북바위다.

불당골(佛堂谷) : 유량동 안쪽 지금의 민방위학교가 있는 골짜기.
아홉사리고개를 오르는 첫 골짜기로 옛날에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고 불당
골이다. 지금은 사찰은 없고 절터만이 남아있어 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留麗王寺나 馬點寺의 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석벽골(石壁谷) : 유량동 동쪽 태조봉의 아래 골짜기. 대한교육보험의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바위도 돌도 없는 골짜기이나 석벽골짜기라고 불
린다. 동리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석벽"이라는 장사
가 살아서 석벽골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쇠목고개(牛首峙) : 유량동에서 안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민방위학교에서 호서
대학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스팔트가 잘되어 산책하기에 매우 좋은 길이
다. 태조봉을 소의 몸으로 보고 왕자산을 소의 머리로 보았을 때 지금의
고갯길은 소의 목부분에 맞기 때문에 쇠목고개라고 하였다. (소목고개)

승천고개(升川고개) : 유량동에서 목천면 승천골로 넘어가는 고개.
매우 높고 험하다. 天安川과 竝川의 분수령이다.
(승천천의 물은 병천에 합해져 미호천에 흐른다.)

아홉사리고개(九曲峙) : 유량동에서 목천면 삼방리(三方里)로 넘어가는 고개.
크게 아홉번 굽이져 온다고 아홉사리고개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이전에
는 매우 큰길로 목천지방 사람들이 천안에 오려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국수나 새끼를 사리듯 꼬부라진 고개)

양달말(陽洞) : 분톳골 동쪽에 있는 마을. 아침 햇살을 받을 때부터 저녁해가
질때까지 종일 햇볕을 받는 마을이라 양달마을이라고 하였다.

옥녀봉(玉女峰) : 쇠목고개를 바라보아 오른쪽에 있는 뾰족한 산.
산의 모습이 아름다운 옥녀모습으로 생겼다고 玉女峰이다.
마을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여자모양의 산이라 명당이 없는 산이고 만
약에 이 산에 무덤을 만들면 후손이 잘되지 못한다고 전한다.

용제봉(龍祭峰:선애골) : 태조산 야영장이 있는 옆산.
용제를 지내는 산이라 용제봉이라 하였다. 용제는 기우제(祈雨祭)를 말
하는 것으로 가뭄이 들고 메말라서 농사에 지장이 있으면 이 산에서 제사
를 지냈다.

하마비(下馬碑) : 천안향교 앞에 세워진 비석. 어느 지방이나 향교 앞에는 모두
있다. 비문은 大小人皆下馬라고 썼다. 지위가 높고 낮은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가라는 뜻이다. 향교에 뫼신분들이 공자나 맹자이고 모두 성
현들이기 때문에 그 앞을 말을 타고 지나지 말라는 뜻으로 세워진 碑이
다.

한티골 : 교보생명인재개발원이 있는 아래쪽 골짜기. 골짜기 위에 아홉사리 고개
가 지난다. 한티란 큰 고개를 말함이니 큰 고개에 있는 골짜기라
한티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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