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지명유래

공유열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프린트
제목 가전리
팀명 병천면 등록일 2015-11-30 조회 5160
첨부
 
목천군 근동면 지역인데 1895년 지방행정 편제 때 갈전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
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백전리, 하백전리, 용연리, 가암리, 서원리 일부를 병
합하여 가암리의 가자와 백전리의 전자를 따서 가전리라 하고 갈전면에 편입되었
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지므로 병천면 가전리가 되었
다.

거북바위 : 구암(龜岩), 잣밭 앞에 있는 바위. 큰 바위가 둘이 겹쳐서 거북이 모
양으로 서 있고,그 옆에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바위 동쪽에 김씨
세거(金氏世居), 북쪽에 백전동천(栢田洞天)이라 새겼다.
명종때 명신 김충갑(金忠甲)이 그의 장인 이성춘(李成春)의 재산을 이어
받아 이 마을에 살면서 그호를 구암(龜岩)이라 하였다.

느티나무 : 거북바위 옆에 있는 큰 느티나무.

골 문달안 : 문달안 옆 골에 있는 골짜기.

(전설) : 큰 느티나무 아래에 전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이무기가 살면서 이근처
의 짐승들을 많이 해치므로 김충갑의 아들 충무공 김시민이 아홉 살 때
동네 아이들을 시켜 느티나무에 오르게 하고, 이무기가 아이들의 그림자
를 보고 물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아이들을 향하여 올라 오는 것을 활
로 쏘아 서른 세발을 맞추어 죽였는데 그 피가 십여일이나 붉게 흘러 나
왔다고 한다. 이런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인 김재홍씨가 사사처란
비를 세워 놓았다.

강당산 : 돌모루 앞에 있는 산. 그 밑에 도정강사(挑汀講舍)가 있었다.

개등어리 : 장승백이 북쪽에 있는 산. 산 모양이 개 등어리와 같이 생겼다고 한
다.

가락부리 : 가암(佳岩)이라고도 하는데 돌모루 동쪽에 있는 마을.
마을 모양이 가락부리와 같다고도 하며 마을 앞에 좋은 바위가 있었는데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강당골 : 창평 이씨 묘와 제학공의 제단이 있는데 창평이씨는 충무공 김시민의
외조부이며 제학공은 안동 김씨의 중시조이다.
이 자리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이며 명나라 명사 두사총(杜師聰)이 소
점인데 말이 물을 마시는 형이라 하며 은(銀) 세말을 폐백으로 주었다고
전하여 온다.

팟자들 : 널버텅이라고도 하며 갈마음수형 밑에 있는데, 넓고 말 외양간의 널과
같다고 한다.

돌모루 : 하백전(下栢田) 모퉁이에 돌산이 있어 돌모루라 하며 잣밭 아래쪽이 된
다.

독바위 : 얹힌 바위. 영암(靈岩). 새말 서쪽 모퉁이 냇가에 있는 바위.
독 같은 바위가 얹혀 있는데 얹힌 자리에서 밑바위까지 실구멍이 통한다
고 한다.

돌산 : 석산(石山). 돌모루 옆에 있는 산. 산 밑에서 봉우리까지 돌이 험하게 박
혀 있다고 한다.

투구봉 : 잣밭 앞에 있는 산. 산 모양이 투구와 같다.

조골 : 장승백이 북쪽에 있는 마을. 철의 일을 했다.

충열사터(忠烈祠터) : 가전리 249번지 돌모루에 있는 충열사터.
정랑 조명, 충무공 김시민, 죽계 김계종을 배향했는데 고종 5년 1864년
폐지되었다.

진등 : 잣밭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등이 길다.

새말 : 용연(龍淵), 잣밭 서쪽에 새로 된 마을 앞에 용못이 있었다.
갓소못이 라고도 한다.

잣밭 : 백전(栢田), 상백전이라고도 하는데 세성산이 농성이었을 당시 그 성에
따른 성밭(城田)에서 연유되어 재밭이 되었다.

장승백이 : 세 고개 밑에 있는 마을. 예전에 이곳에 장승이 있었다.

상장골 : 삼성동(三省洞) 잣밭 서쪽에 있는 골짜기.
인조때 학자 황종해(黃宗海)가 그 아버지 묘를 쓰고 날마다 세 번씩 성묘
하였다고 한다.

부엉바위 : 투구봉 동쪽 기슭에 있는 바위. 모양이 부엉이 같이 생겼다 한다.

말무덤 : 상장골 위에 있는 옛 무덤. 지금은 없어졌음.

사근다리 : 잣밭 동쪽에 있는 골. 산등이 길다.

배락골 : 잣밭 뒤에 있는 골짜기.

명태골 : 명태 한 코 하고 논 일곱마지기와 바꾸었으므로 명태골이라고 한다.

만지원고개 : 새말에서 북면 만지원으로 넘어가는 고개.

말탄돌 : 국도 변에 돌을 깎아 세워 놓았는데 이 돌에 올라서 말을 탔으므로 말
탄 돌이라고 한다. 현재는 없어졌다.

최쟁이골 : 공인(工人)들이 살던 곳. 공인을 쟁이라고 불렀기때문에 쟁이 골이라
한다.

목록 링크복사

만족도조사
만족도 조사

현재 페이지의 내용과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만족도 조사결과는 서비스 개선을 위한 자료로 활용됩니다.

담당부서 :  
총무팀
연락처 :  
041-521-4785
최종수정일 :
2024-02-20 1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