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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원리
팀명 병천면 등록일 2015-11-30 조회 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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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군 근동면 지역으로 처음에 도원(挑元)이라 하였는데 세마(洗馬) 김만중(金
萬重)이 병자호란의 강화를 싫어하여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진나라
사람들이 도원에 가서 피난한 뜻에 따라 호를 도원(挑元)이라 하고 동네이름도
호를 따라 도원(挑源)으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평기리,
도원리, 광기리, 덕신리, 가정리, 반계리, 명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원리라 하
고 갈전면에 편입되었다. 1942년 갈전면이 병천면으로 개칭되므로 병천면 도원
리가 되었다.

중 썩은골 : (전설) 이곳에 사는 한 장수가 병풍 바위 옆에 앉아 있는데 지나가
던 중이 우리 힘자랑 합시다. 누가 빠르고 쉽게 이 병풍바위를 오르는
가? 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만약에 지는 사람은 어떠한 벌도 달게 받
기로 하고 먼저 중이 뛰어 오르는데 끝까지 오르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
다.
다음에 이곳 장수가 뛰어 오르는데 쉽게 뛰어 올랐다. 오르고 내려온 장
수는 형편없는 중놈이 까분다고 하면서 등을 잡고 던진 것이 이 골에 떨
어져 죽었다. 그후부터 이곳을 중썩은 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전설) : 노은정에서 광터골에 가려면 돌이 거북이 같이 생긴것이 있었는데 이곳
에서 [거북]하고 대답하는데 이말이 크게 들리고 작게 들리는데 따라서
광터골이 흥하고 도원골이 망한다고 하여 광터골 사람들이 정으로 부수어
소리가 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노은정(老隱亭) : 검계가에 있는 정자. 큰 바위에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고 그
아래는 냇물이 깊이 패여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숙종 때 학자 김상기
(金相器)가 벼슬을 하려고 스물네차례나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이 되고
노년에 모든 세상일을 잊으려고 이 정자를 짓고 큰 바위에 노은정(老隱
亭) 석자를 새겼다.

광터골 : 광기(廣基).광기리, 도원골 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 구리성에 웅거 할
때 이곳에 관을 두었으므로 관터 골이라하던 것이 변하여 광터 골 또는
광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바위 : 구암(口岩) 도원골 건너 미륵당 서쪽에 있는 바위.

(전설) : 바위가 입을 벌리고 동네를 향하여 있는데 풍수가가 이 동네의 기운을
빨아 먹어 버린다하여 동네 사람들이 날을 정하여 없애 버리려고 하는데
이 때 마침 그 마을에 사는 김도혁(金道赫)이 서산원이 되어 있었다.
어느날 김도혁의 꿈에 한노인이 간청하기를 나는 입바위 산신인데 사람
들이 나를 없애려고 하니 그대가 구해달라 하므로 김도혁이 곧 돌아와서
동네 삶을 설득시켜 금지 시키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대록지)

칠성바위(七星) : 입바위 아래에 있는데 큰 바위가 북두칠성같이 놓여 있다.

수탁개울 : 노은정 왼쪽에 있는 골. 골의 물을 홈으로 흘러내려 오게 하여 사용
하였다고 한다.

소반봉(小盤峯) : 울바위 뒤쪽에 있는 봉우리 모양이 소반과 같다.

심방골 : 벌터 앞에 있는 골짜기.

섶골 : 번재울 남쪽에 있는 골. 반계(磻溪) 한응남(韓應南)의 묘가 있다.

삭성대(削成臺) : 노은정 아래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대를 만든 듯 한 바위가 냇
가에 있는데 우암 송시열이 삭성대 석자를 새겼다.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다.

벼루바위 : 벌터 앞에 있는 큰 바위. 바위 모양이 벼루같이 생겼다고 한다.

벌터 : 덕신(德新) 광터골 밖 벌판에 있는 마을. 인조 때 학자 이효범(李孝範)
이 서당을 짓고 후진들을 가르쳤으며 마을 이름이 덕신이라 하였다고 한
다.

번재울(磻溪) : 벌터 서북쪽 골에 있는 마을. 마을이 성처럼 둘러 쌓여 있어서
높고 아늑하며 선조 때 학자 한응기(韓應箕), 한응남(韓應南) 형제가 번
재울에 살았는데 살면서 호를 반계(磻溪)라 하였다. 그가 한응남이다.

백석탄(白石灘) : 도원골 입구 냇가에 있는 여울. 크고 흰 바위가 누워 있는데
그 바위예 백석탄 석자를 새겨 놓았다.

반계송남유허비 : 번재울 입구에 있는 선조 때 반계(磻溪) 한응기(韓應箕) 송암
(松庵) 한응남(韓應南)형제의 사적을 적었다.

도원정(挑源亭) : 도원골 입구에 있는데 강릉 김씨문중에서 세웠으며 도원(挑
源) 김만중(金萬重)의 사적 및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미륵당 : 칠성바위 아래 논가에 있는 미륵당.

면실 : 벌말, 평기(平基), 도원골 아래 벌판에 있는 마을. 숙종때 학자 김일우
(金一宇)가 처음 터를 잡아 살면서 실학에 힘쓰라는 뜻에서 면실(勉實)이
라 하였다. 동학때 접주 김고양이 살았으며 왜군들이 부락에 불을 놓아
전부락이 소실되고 없었는데 새로 신축된 마을이라 한다.

도원동리비 : 도원골 입구에 있는 비.
작은 비에 도원동리 대명천하(挑源洞裡大明天下)라 새겼고 그 옆에 느티
나무가 있으며 앞에 도원정이 있고 그 밑 냇가에 백석탄이라 새긴 흰돌이
있다. 이 도원동리 비는 신독재 김집(金集)의 글씨라고 한다.

노은정 : 가정이라고도 하며 노은정에 있는 마을.

도영암(倒影岩) : 삭성대 옆에 있는 바위.
바위가 비스듬히 서 있어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도영암 석자를 새겼다
고 한다.

강당터 : 번개울 뒤에 있는 강당 터.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처가인 한씨들의
인연으로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다락동 : 누동(樓洞) 광터 골 동쪽에 있는 골.

고무래 봉 : 입바위 북쪽에 있는 산. 모양이 고무래 같이 생겼다고 한다.

검계(儉溪) : 노은정 앞에 있는 내. 삭성대 도영암들이 있었다.

울바위 : 명암(鳴岩), 병풍바위라고도 하는데 도로 옆에 있는데 병풍처럼 생겼으
며 이곳에 석굴이 있다고 한다.

(전설) : 병풍바위에 굴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도로 확장으로 묻히어 없어졌고
하나도 앞이 막혀 찾기가 쉽지 않다. 옛날에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인색하여 중이 시주를 하라고 하여도 거절하고 모욕만 주고 하였다.
하루는 중이 분하여 이 집을 망하게 하려고 이 집이 더 큰 부자가 될 방
도가 있다고하니 욕심많은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중
을 정중히 모시고 방도를 일러 주기를 청하였다. 중은 병풍바위의 굴이
두 개가 있는데 위굴의 입구를 막아버리면 이 집이 더 큰 부자가 되고 부
귀를 누리며 호강한다고 일러 주었다. 부자는 중이 시키는대로 굴의 위
돌을 깎아 입구를 봉하였다. 굴윗돌의 돌을 깎을 때에 돌에서 피가 나왔
으며 굴 입구를 막은 후 이 부자는 망해 버렸고 그때 굴 위 바위를 떼냈
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한다. 목천읍지인 대록지에 의하면 이 굴에
불을 때면 사흘후에 그 연기가 작성산성 꼭대기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심방동 : 수안이씨 들이 살았으며 묘들이 있다.

거미중터 : 생김이 거미와 같다고 한다.

둔터고개 : 군이 주둔하였던 고개라고 전해온다.

범박골 : 주물로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틀을 질흙으로 만들어 철일을 보조하던
곳. 사정대 안동김씨 김옥(金 )이 활을 쏘고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 한
다.

명암(鳴岩) : 울바위 옆에 판서 유명홍(兪命弘)대감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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