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남화리 | ||||
팀명 | 목천읍 | 등록일 | 2015-11-30 | 조회 | 2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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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군 읍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동과
남동이 병합하여 남화리라 하였는데 옛날에는 남벌이었으며 서면 지역이었다. 고양이바위 : (전설) 남화리 동구밖 백호러리 현재 파출소 부근에 있는 바위. 고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생긴 모양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상씨 가 이 부락에서 부자로 잘살고 있었다. 어떻게 잘못하여 종을 죽였다고 한다. 이를 본 종의 아들은 복수를 할 각오로 이를 갈며 이 집을 도망하 여 먼 곳으로 가서 지술을 배워 가지고 이동네를 찾아 왔다. 어릴적에 떠난 관계로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상씨네 부잣집의 며느리는 잘살기 때문에 손님이 자주 찾아오므로 손에서 물마를 사이가 없어 손가 락 사이에 진물이 날 정도여서 불평이 많았다. 이때 종으로부터 동네에 용한 점술과 지술을 보는 사람이 있어서 앞을 다투어 모여 든다는 말을 듣고 식구들 몰래 종과 같이 이 사람을 찾았다. 이 점술쟁이의 말이 아 무리 부자라도 손에 물이 마를 사이가 없으니 팔자는 기구하다고 하면서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도 잘살고 부위할 방도가 있다고 말하니 상씨며느 리가 반하여 매달리다시피하여 알려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점술사는 이 곳 남벌의 뒤에 노적봉이 있고 삼태기에 고무래로 곡식을 담아 쌓은 형인 데 앞의 산들이 성난 쥐와 같아서 곡식을 훔쳐 먹으러 들어오려고 하다가 도 입구에 고양이가 입을 벌리고 있어 잡혀 먹힐까 두려워 못들어 오기 때문에 상씨가 부자로 잘사는 터 인지라 고양이 바위만 없애면 망할게 분 명한 것을 알고 형상을 바꾸어 말하여 주었다. 늙은 쥐가 뒷산에 가득하 여곡식을 자꾸 자꾸 파먹으므로 손에 물 안묻히는 부자가 되려고 해도 안 된다고 하고 고양이 바위를 부수어 버리면 지금 늙은쥐들이 나가려 해 도 고양이 때문에 못 나가니까 고양이만 없으면 쥐들이 다나가 버려 소원 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남에게 이야기하거나 상의하지 말고 속히 없애는게 상책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 들은 상씨 며느리는 집에 와 서 종과 아래것 장정들을 모아놓고 밤 사이로 고양이 바위를 없애도록 시 키고 집안 어른들에게는 일체 말하여서는 안되며 말하는 자는 엄히 문책 하겠다고 하였다. 하인들은 밤새껏 바위를 부수기 시작하여 새벽에서야 바위를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이 바위를 부수고 난 후에는 우연히 상씨 네도 망해 어디로 가버리고 동네도 돌림병이 돌아 장정들이 없어지고 하 여 부락민들이 돌을 다시 모아 고양이 형상 같이 만들어 놓았었는데 그후 로는 동네가 평안했다고 한다. 모아놓은 돌이 자주 무너지므로 근래는 시멘트로 발라 놓았었다. 남동(南洞) : 남화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독립기념관내 방축골. 기와가마터 서쪽의 골짜기로 방죽이 있었다. 북동(北洞) : 남화리 북쪽에 있는 마을 독립기념관내. 상정승골 : 통미 서쪽에 있는 아늑한 골인데 명종때 정승 상진(尙震)이 이곳에 서 태어났음. (산 20번지) 기와가마터 : 남화리 입구 동네앞에 있었는데 독립기념관이 들어선 후에 어디인 지 분간할 수 없다. 통미 : 남벌 뒤에 외 따로 있는 산. 흑성산 밑이 되는데 현재 독립기념관 추모의 자리 위봉에 해당된다. 토성(土城) : 백제때 토성으로 독립기념관 주차장과 목천고등학교 사이에 있었는 데 주차장 공사로 없어졌다. 장승백이 : 현 독립기념과 주차장 입구인데 옛날에 장승이 서있었다고 한다. 토성 : (전설) 옛날 토성 부근으로 토성안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에 큰 동네 가 있고 인구가 꽤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하루는 아버지와 아들이 뒷동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나무들이 울창하 고 커서 밑에서는 할 도리가 없으므로 아들은 나무에 올라가 도끼로 나무 가지를 자르고 아버지는 밑에서 아 들이 잘라 내린 나뭇가지를 차곡차곡 전을 치고 있는데 나무 위에서 나뭇가지를 자르던 아들의 도끼 날이 자 루에서 빠져 떨어져서 아버지의 머리 정수리에 맞아 아버지가 그 자리에 서 즉사하였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고의 과실 여부를 불문하고 아버지를 죽인자가 이 고을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이 고을을 폐하고 전의현에 붙이 었다. 이곳이 독립기념관 주차장 관계로 없어졌고 그리고 이 동네는 그 당시 폐동시켰다고 전한다. |